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말하면 단순한 외계 생명체 이야기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 컨택트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외계 문명과의 만남이라는 설정을 빌려서, 오히려 인간의 삶, 언어, 시간,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나 언어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이라면, 분명 이 영화에서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존재라는 감각을 다시 묻다
영화 속 주인공 루이스는 언어학자입니다. 그녀는 낯선 존재인 헵타포드와의 소통을 위해 언어를 배웁니다. 그런데 그 언어를 알아간다는 과정이 단순히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들이 가진 세계관, 시간 개념, 존재 방식까지 흡수해 가는 여정처럼 보였습니다.
헵타포드는 시간을 직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순환처럼 흐르고, 시작과 끝이 따로 없습니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를 익히면서 그 사고방식에 물들어갑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미래의 일들을 알게되고, 동시에 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했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조용히 따라붙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바꾼다는 것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언어입니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일종의 그림 언어인데, 한 문장을 그리는 데 앞뒤 구분이 없습니다. 그 전체를 한 번에 구사합니다. 이걸 배우면서 루이스는 사고방식이 바뀝니다. 그저 언어를 배운다기보다, 세계 인식 자체가 바뀌는 경험인 겁니다.
이런 설정을 보면서 자연스레 사피어-워프 가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그 가설을 시각적으로 아주 설득력 있게 구현해냅니다. 말이 단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될 수 있다는 것. 제게는 꽤 오랜 여운이 남았습니다.
이처럼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사고와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설정은, 언어철학과 인지과학의 접점에서 오랫동안논의되어 온 주제입니다. 루이스가 언어를 습득하며 시간 감각까지 변화하는 모습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관객으로서 저 역시 '내가 쓰는 말'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왔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선택과 시간, 그리고 인간
철학적으로 이 영화는 참 풍부합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그 오래된 주제를 새롭게 풀어냅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그대로 살아냅니다. 사르트르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은 자유"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도 생각났습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라는 것. 영화 속 시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이자, 감정의 구조입니다.
마무리하며 – 이 영화를 권하고 싶은 이유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쉬운 영화는 아닙니다. 액션이 터지지도 않고, 눈에 띄게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도 드뭅니다. 하지만 한 번 빠져들면,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철학적인 영화’라는 표현이 가끔 거창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컨택트는 정말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특히 존재, 언어,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분이라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느끼실 겁니다.
그러니 만약 지금 조금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면, 혹은 감정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꼭 한 번 이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아마도 보고 나면, 마음 어딘가가 조금은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